지난 24일 전국국공립대학교 인문대학장협의회와 전국사립대학교 인문대학장협의회는 성명서를 통해 “무전공 입학 확대는 기초학문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학에서 기초학문 분야가 사라지고, 의대·이공계 등 인기학과 쏠림 현상이 더욱 심해져 대학의 학문 생태계가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책 없는 무전공 모집제도 도입은 기초학문 붕괴를 가속할 것”이라며 “학생이 적성에 따라 전공을 선택하기보다 시류에 휩쓸려 소수 인기학과를 선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지적했다.
대학 내 학사 제도, 학과 인원에 맞는 교실 환경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서둘러 무전공 입학 제도를 도입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크다. 현재 대학에서는 복수전공 등을 통해 소위 인기학과에만 학생이 몰리면서 교육 여건이 크게 악화된 게 사실이다.
무전공 입학 제도가 명문대 중심의 헤게모니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학과 단위로 모집하는 입시 제도에서는 대학보다 학과를 보고 진학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무전공 입학이 확대되면 입학 후 전공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명문대 선호 현상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고등학교 3학년 학부모 조윤주 씨는 “무전공 입학이 학생들의 진로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당장 대입을 앞둔 학부모와 학생 입장에서는 대학 간판 위주의 줄 세우기가 심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2025학년도부터 시행되는 고교학점제와 엇박자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학생의 적성과 진로에 맞는 과목을 학생 스스로 선택하는 고교학점제가 대학 무전공 입학 정책과 충돌해 시행도 하기 전에 흐지부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 강북의 중학교 진로교사는 “고교학점제가 시행되면 전공 적합성에 따른 과목 선택 등이 중요하다. 그런데 대학 입학한 순간 다시 전공 적합성이 중요하지 않은 상황이 된다면 고교학점제는 사실상 명맥만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고 의견을 밝혔다.
올해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인 김선아 양은 “고등학교는 학점제를 시행하고 대학 선발은 무전공으로 하려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며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정책이 바뀌어 학생 입장에서는 연속성이 결여 되는 것 같아 혼란스럽다”고 토로했다.
그렇다면 대다수 명문대가 무전공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미국에서는 이 제도를 어떻게 운영할까. 스탠포드대는 학부생 1730명 전원을 자유전공으로 뽑는다. 코넬대는 3500명 내외 신입생을 단과대별로 선발한다. 인기학과 쏠림 현상은 미국 대학 또한 갖고 있는 문제다. 실제 스탠포드대는 입학생 2000여명 중 컴퓨터공학 전공 학생을 700명 이상 배출했다.
반대로 한해 전공 졸업생이 10명 미만인 학과도 많다. 해외대 입시·진학 기업 크림슨 에듀케이션 코리아가 공개한 미국 명문대 전공 졸업생 수를 보면 미국 대학 랭킹 1위인 프린스턴대의 2020~2021학년도 건축학과 졸업생 수는 6명(0.53%), 천체물리학과 졸업생 수는 8명(0.71%)에 불과했다. 예일대도 마찬가지다. 천체물리학과 3명(0.27%), 인류학과 6명(0.53%), 미국학 7명(0.62%) 등으로 나타났다. 미국 명문대도 학생이 몰리는 인기학과와 비인기학과 간 졸업생 수의 차이가 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인기 학과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대학원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서다. 미국 대학은 대학원 연구 기금을 외부에서 지원받기 때문에 대학 재정을 학생들의 등록금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미국 대학은 전공을 바꿀 기회를 여러 번 준다. 1·2학년 때 다른 전공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둔다. 학생들은 전공을 정하는 3학년이 되기 전까지 자유롭게 수업을 듣고 전공을 결정한다. 때문에 미국에서는 컴퓨터 엔지니어링에 관심을 갖던 학생이 철학 학위를 받아 졸업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대신 대학은 전공별 선수 과목을 미리 지정해 공지한다. 학생들이 원하는 전공을 공부하기 위해 반드시 들어야 하는 필수 과목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입학 후 학교 내 코디네이터와 주기적으로 진로와 전공을 상담하면서 미래 학업에 대한 그림을 그려나간다. 학생이 원하는 전공과 관련한 선수 과목을 수강하지 않은 학생은 대학에서 마련한 별도의 수업을 듣고 기초 체력을 키워야 한다.
한상범 크림슨 에듀케이션 코리아 대표는 “무전공으로 미국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4년 내내 교양과목부터 전공 설계까지 스스로 해야하기 때문에 대학 생활이 무척 바쁘다”며 “무전공 입학의 장점 중 하나는 학생들이 대학 생활을 주체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교육 전문가들은 앞으로 고교학점제, 대학 무전공 입학 등 교육 제도의 변화에 따라 학생의 진로 탐색 시기가 점점 빨라질 것으로 내다본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학과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초·중등학교 시절부터 적성·진로에 관심을 갖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스탠포드, UCLA 등 미국 대학은 신입생을 선발할 때 학생이 그동안 어떤 직업 탐색 과정을 거쳐왔는지를 살펴본다. 학생 선발 시 ‘업무 경험(Work Experience)’, ‘자원봉사(Volunteer work)’ 항목을 고려 요소로 반영한다. 고등학교 때 인턴과 같은 다양한 경험을 높이 사는 것이다.
최근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2023 교육통계 분석자료집’에 따르면 지난해 대학 입학생 4명 가운데 1명이 재수와 N수생인 것으로 나타났다. 작년 재수·N수생은 8만5872명으로, 1년 전에 비해 1.1% 증가했다. 전공에 흥미를 갖지 못하고 다시 수능을 보는 재수·N수생이 증가한 것은 학창 시절 진로 고민을 충분히 하지 못한 것도 하나의 이유로 꼽힌다.
◇“사회적 비용 증가와 산업경쟁력 약화 우려”
사회적 비용 증가와 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전공을 살리지 못한 졸업생이 다시 수능을 보게 되면 개인과 사회의 기회비용이 모두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적성에 맞지 않는 전공을 택해 그에 걸맞은 역량을 갖추지 못한 졸업생이 기업에 입사할 경우 기업의 재교육 비용도 증가한다.
학령인구 감소와 융합 인재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따라 대학의 무전공 입학은 점차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외 대학의 무전공 입학 시스템을 국내 대학에 그대로 이식하기보다 우리 실정에 맞는 제도 개발·운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산업 지형, 대학 학사 시스템, 학문적 기반 등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사전 준비 없이 무리하게 무전공 입학 제도를 도입하기에 앞서 단계적 대안으로 복수전공·부전공 등 기존 제도를 활용해 전공 이동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한창석 대원국제중 진로교사는 “성급하게 무전공 입학을 도입하기보다 기존 제도 안에서 복수전공 제도 등을 유연하게 운영하거나 부전공을 내실화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며 “무전공 입학이 확대될 경우, 명목상 수업이 아니라 학생들이 진로에 관한 탐색을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마송은 기자 runni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