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신문] [과학기술이 미래다]〈153〉헌법기구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시대 개막…초대 위원장에 김성진 전 과기처 장관

노태우 대통령이 1991년 5월 31일 청와대에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들과 악수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노태우 대통령이 1991년 5월 31일 청와대에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들과 악수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시대가 열렸다.

1991년 5월 31일 오전 노태우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헌법기구로 새롭게 출범하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초대 위원장인 김성진 전 과학기술처 장관 등 11명의 자문위원들에게 위촉장을 수여했다. 이들의 임기는 2년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어 청와대 집현실에서 첫 자문회의를 주재했다. 회의 분위기는 남다른 기대감으로 의욕에 넘쳤다.

“지금 세계 각국은 국력 원천이 바로 과학기술력이라는 인식 아래 경쟁적으로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자문회의가 과학기술 진흥과 정책 강화에 중추 역할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 대통령은 “우리 과학기술을 10년 이내 선진 7개국 수준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고 대통령이 통치 차원에서 과학기술정책을 잘 추진할 수 있도록 좋은 정책 건의와 대안을 제시해 주기 바란다”면서 “정부와 산·학·연 역할 분담 방안과 특히 과학기술 투자를 2000년까지 GNP 5% 수준으로 확대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과 과학기술자들이 연구개발에 전념할 수 있는 방안도 제시해 달라”고 당부했다.

노 대통령은 “최근 들어 정부 각 부처가 과학기술 진흥에 열의를 보여 바람직하지만 자칫 부처 이기주의로 과학기술 발전을 저해할 우려가 있는 만큼 정부 부처 간 합리적인 업무 조정 방안도 검토해 달라”고 말했다.

이날 위촉장을 받은 자문위원은 모두 11명이다. 위원들은 한국 과학기술계를 대표하는 저명 인사들이었다.

초대 위원장인 김성진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인천 출생으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다. 육사를 수석 입학하고 수석 졸업한 수재로, 육사의 상징으로 통했다. 육사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거쳐 육사 교수로서 후배들을 지도했다. 미국 유학을 떠나 일리노이대와 플로리다대에서 각각 물리학 박사,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에는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일했고, 1973년부터 미국 대사관 국방무관으로 근무했다.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후 1980년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과 제1차장, 제2차장을 거쳐 국방과학연구소장으로 일했다. 1983년 10월 최순달 체신부 장관 후임으로 제33대 체신부 장관을 지냈고, 1985년 2월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취임했다. 장관 재임 시절 정보화 시대에 대비한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을 적극 추진했다.

김성진 위원장 임명은 노태우 대통령의 뜻이었다.

김진형 과학기술처 장관의 회고록 증언. “충남 안면도 사태 이후 한국원자력연구소장은 바꿀 수밖에 없었다. 후임을 이리저리 궁리했다. 청와대와 동자부, 한국전력을 상대하고 다룰 능력이 있어야 했다. 내 수첩엔 김성진, 이정오 전 과기처 장관 이름이 나온다. 특히 나는 김 전 장관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청와대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으로 돌렸다.”(대한민국 성찰의 기록)

원로급 자문위원으로는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낸 최형섭 박사를 위촉했다. 최 박사는 1966년 초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소장으로 취임해 KIST를 한국 과학기술 산실로 키운 과학계 대부였다.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1년 과학기술부 장관으로 취임해 7년 6개월 재임, 한국 최장수 장관 기록을 세웠다. 장관 재임 시절 대덕연구단지 조성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설립을 추진했다. 특히 전국민과학화 운동과 새마을 기술봉사단, 1마을 1과학자 기술결연 등을 전개했다. 이용태 박약회 회장(전 삼보컴퓨터 회장)은 “최 장관은 남다른 카리스마와 열정, 추진력 등으로 한국과학기술계 대부이자 거울이었다”고 회고했다.

조완규 서울대 명예총장은 한시 기구인 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으로 일했다. 조 명예총장은 위원장 시절 “대통령이 과학기술을 주도하고 자문회의를 상설화해야 한다”고 강력 건의, 이를 관철시켰다.

조순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한국경제학계의 거목이었다. 조 전 부총리는 노태우 대통령과 사제지간이다. 조 전 부총리는 1952~1957년 육사 영어교관으로 재직하면서 당시 전두환·노태우 생도를 가르쳤다. 이런 인연으로 노태우 정부에서 부총리로 일했고, 이후 한국은행 총재와 서울시장을 역임했다.

학계·연구계 인사로 전무식 KAIST 교수, 심정섭 서울대 명예교수, 김영식 서울대 교수, 김상종 서울대 교수, 이은철 서울대 교수, 윤창구 KIST 화공연구부장 등이 위촉장을 받았다. 노 대통령은 당연직인 간사위원으로는 김진현 과학기술처 장관을 위촉했다.

자문위원 선정과 관련한 과학기술처 전 고위관계자의 말.

“과학기술처는 1991년 5월 김호기 전 국립중앙과학관장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사무처장으로 내정하고 자문위원 인선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자문회의의 중요성을 감안해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분야별 과학기술계 대표 인사들로 원로와 신진 과학자들을 균형 있게 인선했습니다. 활력 있는 자문기구로 운영하고자 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회의 주재 후 자문회의 위원들과 오찬을 함께했다.

이날 오전 2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청와대 오찬이 끝난 후 서울 성북구 KIST 본관 입구에서 김성진 위원장, 김진현 과학기술처 장관 등이 함께한 가운데 현판식을 가졌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이어 오후 2시 30분부터 회의실에서 제1차 회의를 열고 과학기술정책의 주요 현안을 논의했다. 첫 회의에는 자문위원과 청와대·과학기술처 관계자 등 모두 21명이 참석했다.

김성진 위원장이 회의 개회를 선언했다.

“지금부터 제1차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회의에서 김진현 과학기술처 장관이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설치 배경, 추진 경위, 구성, 운영 등을 보고했다. 이어 박진호 과학기술처 기획관리실장이 과학기술정책 기본방향과 추진체제를 보고했다. 박 실장은 추진하고 있는 주요 현안으로 제조영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술개발 지원 방향과 과학기술 협력체제 구축 방안, 과학기술 관련 정부출연연구기관 평가 추진 방안, 방사선 폐기물 관리 대책,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 제고와 사회적 수용 확산 대책 등을 보고했다.

김호기 자문회의 사무처장은 국가과학자문회의 운영 방안을 보고했다.

사무처 산하에는 △제1조사실(기초과학과 거대과학 분야) △제2조사실(산업기술 분야) △제3조사실(복지기술 분야) △기획, 행정실(인력투자, 정보, 국제협력, 기획예산 등)을 두기로 했다. 또 과제별 연구를 위해 학계와 연구소 등에서 전문위원을 위촉해서 운영키로 했다. 염재호 현 국가AI위원회 부위원장, 정성철 전 과학기술정책연구원장, 조영화 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장 등 20여명이 당시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사무처 직원은 과학기술처를 비롯해 상공부, 동력자원부, 체신부 등 관련 부처 공무원과 6개 연구기관에서 25명이 파견돼 근무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첫 회의에서 주문한 과제는 △과학기술 투자 재원 동원과 활용 방안 △기초연구 진흥과 과학기술인력 양성 방안 △기술 발전을 위한 산·학·연의 효율적 협력 방안 △원자력 행정 업무조정 방안 등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 가운데 가장 시급한 과제로 ‘원자력 행정업무 조정방안’을 주문했다.

당시 자문회의 기획실장이던 김대식 전 대덕연구단지관리소장의 증언.

“당시 원자력법에 의해 원자력 정책과 연구개발, 안전, 방사성폐기물 등 주관부처는 과학기술처였다. 이 업무를 과학기술처와 동자부 간 기능을 재정립하는 과제였다. 자문회의는 이 과제의 전문적인 검토를 위해 원자력 전문가인 강창순 서울대 교수 등 7명으로 소위원회를 구성해 3개월 간 검토했다.”(과학기술 선진국을 이룬 숨겨진 이야기들)

소위원회는 주요 원자력 사업은 동자부로 이관한다는 보고서를 자문회의 회의에 상정했다. 이를 놓고 본회의는 세 차례에 걸쳐 심층 토의를 했다. 그 과정에서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과 전무식 교수 등이 이의를 제기했다. 이후 ‘중기로는 과학기술처가 안전 규격과 연구개발 업무를 관장하고 동자부는 원자력 발전사업을 관장하며, 장기로는 원자력 업무를 일원화한다는 내용을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자문회의는 이후 과학기술 강국을 향한 힘찬 항해를 시작했다. 국가 미래가 걸린 담대한 항해였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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