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경 국제투자협력 대사, ‘한국사의 재해석을 통한 역사인식의 전환’ 주제 강연
![[아이티비즈] [영림원CEO포럼] “한국사 기록은 은폐·과장·왜곡·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1 최중경 국제투자협력 대사](http://www.it-b.co.kr/news/photo/202502/80173_78130_202.png)
[아이티비즈 박시현 기자] 최중경 국제투자협력 대사가 6일, 202회 영림원CEO포럼에서 ‘한국사의 재해석을 통한 역사인식의 전환’을 주제로 강연했다.
지식경제부 장관을 지내고 현재 한미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최중경 국제투자협력 대사는 이번 강연에서 “한국사 기록은 은폐, 과장, 왜곡,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비판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잘못된 역사기록을 방치하는 것은 민족정기를 흐리게 하고 도덕의식과 애국심, 공동체를 위한 헌신의 가치를 무너뜨린다. 더 늦기 전에 잘못 쓰인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차제에 우리 역사교실을 암기 위주에서 토론 위주로 바꿔야 한다. 역사교육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전략적 사고 능력을 키워주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올바로 쓰인 역사를 가르치고 토론할 때 바람직한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고 국가와 민족의 진로를 제대로 설정하는 전략적 사고를 기를 수 있다”고 밝혔다. 다음은 강연 내용.
◆소비자 관점에서 역사 기록 합리적으로 재해석 = 발상이나 인식을 전환하면 역사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아주 중요한 기회를 창출하고 의외의 해답을 얻을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록펠러는 유정 개발이나 석유 채굴에서 가공, 유통 쪽으로 눈을 돌려 정유회사와 철도회사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함으로써 어마어마한 돈을 모았다.
역사 공부도 발상의 전환을 해보면 의외로 답이 있고, 또 거기에서 새로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 2020.11>와 <잘못 쓰인 한국사의 결정적 순간들, 2023.11>이라는 두 권의 책을 썼다. 관점을 살짝 바꾼 것인데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나는 역사를 전공한 적이 없다. 더 좋은 가전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소비자의 역할이 있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나는 소비자 관점에서 역사 기록을 합리적으로 재해석했다. 그 첫 번째로 승자에 의한 왜곡 가능성을 탐색했으며, 두 번째, 역사를 지배하는 힘의 논리를 외면하고 선악의 논리(도덕)를 앞세워 사실과 인과관계를 왜곡함으로써 엄중한 책임을 회피한 역사적 사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세 번째, 세계사, 동양사 관점에서 한국사를 재해석하고, 네 번째, 현대 이론으로 재해석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논리적인 반박과 추론을 했다.
역사는 암기 과목이 아니라 전략적 사고능력을 배양하는 과목이다. 특히 실패한 역사는 전략적 사고능력을 기르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교재다. 실제로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역사 교육의 목표는 전략적 사고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라고 지침을 세웠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국사 과목을 대학교 수능 시험에서 상당 기간 빼버리면서 그 이유로 수험생들의 암기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우리 역사 교육을 보는 당국의 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역사 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으며 역사 공부에서 남는 게 없다.
◆승자에 의해 왜곡된 백제 멸망의 역사 = 첫 번째, 승자에 의한 왜곡 가능성의 탐색이다. 역사는 이긴 자가 붓을 잡고 쓰기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승자의 왜곡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는 어렸을 때 백제 멸망 과정에 의문점을 갖고 있었다. 백제가 멸망한 원인을 의자왕의 사치와 방종으로 국운이 기울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백제 멸망 과정에서 백제 운명을 건 최후의 전투가 황산벌 전투이며 여기에 동원된 백제군의 규모가 5천명에 불과했다는 역사 서술은 믿기 어렵다. 의자왕이 항복한 후 백제 부흥군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이며 나당연합군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이미 국운이 기울어 민심이 떠났다면 부흥운동이 있을 수 없다. 최후 결전을 위해 긁어모은 군대가 5천명에 불과했다면 막강한 전력을 갖춘 정규군인 백제부흥군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당에서 솟아났다는 말이 된다. 만약 백제군이 5천명 밖에 안되고 의자왕의 실정으로 민심이 피폐해졌다면 무엇 때문에 당나라 군대를 불러들였을까? 신라 혼자의 힘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말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역사 서술은 백제 멸망의 과정에서 뭔가 숨기고 있다는 증거다.
백제는 의자왕이 사치와 방탕을 일삼고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멸망한 게 아니다. 부하가 배신하는 바람에 나당연합군과 단 한 차례도 싸워보지 못하고 의자왕이 사로잡혔다. 의자왕은 사비에서 북쪽에 있는 웅진으로 몽진을 하는데 황산벌에 나가 있는 백제군 5천 명은 몽진하는 의자왕 대열의 우측을 방어하러 나간 별동대였다. 황산벌 전투는 그 별동대와 신라군 사이에 벌어진 소규모 전투였다. 백제 군사 제도는 지방 단위로 분산돼 있으면서 필요하면 모이는 형태였다. 의자왕은 지방군이 결집할 시간을 벌기 위해 몽진 길에 올랐는데 그 선택지가 웅진이었다. 웅진성에서 지방 군대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는데 여기서 큰일이 벌어졌다. 웅진성의 성주 예식이 반란을 일으켜 의자왕을 사로잡고 당나라 장수 소정방 앞으로 끌고가면서 상황은 종료됐다. 예식의 집안은 본래 한족 출신으로서 백제에 귀화한 가문이었다. <구당서> 소정방전에는 “웅진성 수비사령관 예식이 의자왕을 묶어와서 항복했다”는 내용이 있다. 일찍이 단채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의자왕은 신하의 배신으로 포로가 되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는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령군을 데리고 웅진성에서 나와 사비성에서 항복했다”고 기록했다. 웅진성에서 일어난 일에 입을 다문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백제 멸망 과정에 또 하나의 의문이 있다. 계백 장군의 신화는 어디까지 진실인가? 황산벌 전투에 나선 백제군의 지휘관은 좌평 충상, 달솔 계백 그리고 상영(좌평이라는 기록과 달솔이라는 기록이 병존) 등 세 명이었다. 백제 관직 서열상 좌평은 장관급이고 달솔은 차관급이니 당연히 최고사령관은 충상의 차지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황산벌 싸움을 묘사한 것을 보면 계백이 지휘관인 것처럼 되어 있는 데 이것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에도 선비들 가운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계백 신화는 지휘관도 아닌 계백을 왜 지휘관으로 둔갑시켰으까? 충상은 신라군에게 항복해 신라에서 6두품 귀족에 편입되어 벼슬살이를 하며 잘 살았고 백제부흥군 토벌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계백은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기 때문일까?
그런데 계백의 스토리라인 자체는 많은 오류가 있다. 계백 장군의 부대는 백제 최후의 5천 결사대가 아니었으며, 계백은 지휘관이 아니었다. 또 처자식을 죽이고 전쟁터에 나갔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리고 어린 관창을 사로잡고도 죽이지 않고 놓아줬다는 것도 이해가 안된다. 신라가 백제의 명장이 버티고 있는 어려운 싸움터에서 화랑도 정신을 발휘해 극적으로 승리했다고 해야 삼국을 아우르는 주인 역할을 할 수 있기에 가슴에 와 닿는 무용담이 필요했을 것이다.
백제 멸망의 역사는 승자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백제는 왕의 실정으로 무너질 수 밖에 없을 정도의 피폐한 나라가 아니었고 최후의 결사대가 패전함에 따라 항복할 수 밖에 없었던 나라도 아니었다. 멀쩡한 나라였고 나당연합군과 싸울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고구려군의 응원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믿었던 부하의 배신으로 허망하게 무너졌다.
우리 역사 교실은 우리 역사의 중요한 장면인 백제 멸망의 역사 나아가 삼국 몰락의 역사를 있었던대로 설명해야 한다. 승자가 멋대로 왜곡해 앞뒤가 맞지도 않는 역사를 후손들에게 가르치는 건 커다란 죄악이다.
◆“위화도 회군은 명분없는 쿠데타” = 승자에 의한 왜곡 가능성 탐색의 두 번째 이야기는 위화도 회군(1388년)이다.
위화도 회군에 대해 미화를 하고 있는데 요동 정벌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1388년 고려의 우왕과 최영이 주도한 요동 정벌은 공민왕 시절인 1370년에 이미 점령한 바 있는 요동성에 다시 진출해 요동 지배권을 확립하고, 요동이 고구려와 고조선의 옛 강역으로서 동이의 땅임을 천하에 알리며 인정받기 위한 군사작전이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요동정벌군의 지휘권을 갖자 요동 정벌을 중단하고 개경을 점령한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의 명분으로 이른바 ‘4불가론’을 내세워 고려왕조를 대신한 조선왕조에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4불가론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 △농번기 거병은 백성에게 불편하다 △요동 정벌 기간 중 왜국 침략에 대비하기 어렵다 △장마로 활의 아교가 풀어져 활을 쏠 수 없다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는 주장은 요동 정벌의 성격을 왜곡하는 문제가 있다. 요동 정벌은 원명교체기의 혼란을 맞아 우리의 옛땅을 되찾고 주변 민족과 중국에게 인정받겠다는 목적이 우선이었지 명나라와 전면전을 하자고 대든 게 아니었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고려가 요동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명분은 충분했다. 1370년 공민왕 때 요동성을 거의 무혈입성해 점령한 역사가 있다. 또 원나라 지배 시기에도 요동을 다스리는 심양왕에 고려 왕족을 임명했고 1345년부터 1351년까지 6년간은 고려의 왕이 겸직했다. 공민왕의 요동 점령 시에는 수많은 요동 거주민이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며 내응하기도 했다.
농번기 거병은 백성에게 불편하다는 주장은 말도 안된다. 전쟁하는데 농번기가 어디 있느냐. 새로운 지도자로서 백성을 사랑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정치 구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왜구 침략에 대비하기 어렵다는 것도 그럴듯해 보이지만 현실과 맞지 않다. 1380년 진포해전에서 왜구는 거의 전멸됐으며 그래서 상당 기간 왜구는 고려를 두려워했다. 게다가 우왕은 요동 정벌군을 편성할 때 경기도 병력을 남겨 둠으로써 만일의 가능성에 대비하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장마로 아교가 풀어져 활을 쏠 수 없다는 주장은 왠지 어색하다. 우리가 활을 쏘지 못하면 적군도 쏘지 못한다. 이성계는 행군 속도를 느리게 하며 오히려 장마철을 기다린 정황이 있다. 평양을 출발한 정벌군은 신의주까지 200킬로미터를 20일 걸려 하루 평균 10킬로미터의 속도로 행군했다. 그런데 위화도 회군 후 진군 속도는 엄청 빨라졌다. 신의주에서 개경까지 400킬로미터를 단 10일만에 주파했다. 활 이야기는 이성계가 사안을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봤음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이성계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명궁이었다. ‘명궁인 내가 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진다’라는 논리적 비약이 숨어있다.
위화도 회군은 역사의식을 망각한 권력 추구 집단이 주도한 명분없는 쿠데타였다. 이성계가 전쟁터에 나갈 때 늘 따라다니며 큰 활약을 하던 약 2천명의 사병 집단이 요동 정벌에 참여하는 대신 개경으로 침투해 이성계 등 원정군 장수들의 가족을 관리한 것은 위화도 회군이 사전에 기획된 쿠데타라는 점을 방증한다.
◆조선 건국 세력의 잘못된 선택 ‘해금정책’ = 정도전은 권력욕의 화신으로 심지어 신권 정치를 추구했다. 특히 이상한 정책을 많이 펼쳤는데 그중에 첫 번째가 해금 정책이다. 고려는 통상 국가였다. 세계 역사를 봐도 반도 국가들은 무역에 사활을 걸었다. 포에니 전쟁 때 카르타고와 로마가 왜 그렇게 피를 튀기고 싸웠나? 지중해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지중해 무역권을 장악하고 이를 통해 충실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갈리아(프랑스), 게르마니아(독일)를 넘어 브리튼섬과 소아시아까지 영도를 확장했다.
반도 국가인 조선은 로마보다 해양이 더 절실했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는 비좁을 뿐만 아니라 산악 지형이어서 농토가 부족하다. 따라서 무역을 통해 공산품과 특산물을 팔아 부족한 식량을 메꾸는 게 필수적인 과업임에도 조선의 건국 세력은 명나라의 해금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구전으로 내려온 얘기에 의하면 제주도 인구의 3분의 2가 없어졌다고 한다. 해상 무역의 기착지로서 그 역할을 했으면 많은 것이 이뤄졌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동남아 등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은 건국 이후 문을 닫을 때까지 민간인의 무역을 금지하는 해금정책을 실시했다. 조선은 출범할 당시 명나라에 나라 이름까지 정해달라며 저자세를 취했다. 따라서 많은 분야에서 명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베꼈다.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 주원장은 해금정책을 실시했다. 명나라의 해금정책은 신하국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의무사항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조선이 해금정책을 고수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시대에는 활발한 무역활동이 있었고 조선 건국 세력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 건국 세력의 고민이었던 건국 명분의 부족은 정권의 안정성을 떨어뜨렸다. 상당수의 고려 신하들이 이성계 세력을 비토해 협력을 거부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명나라의 해금정책은 조선에서 해양 군사력의 등장을 미연에 막을 수 있는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해금정책으로 일단 정권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가 왕조가 안정된 이후에 되돌리지 않고 그대로 굳어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의 해금정책은 해양을 중요한 활동 무대로 해야 하는 반도 국가 조선의 경제를 절름발이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조선을 바깥 세상으로부터 단절시켰다. 또 경제, 외교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종속을 심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두 번째 이상한 정책은 명나라의 번국을 자처했다는 점이다. 제후국이 된 것이다. 또 무리한 개혁으로 불교를 금지했다. 이것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쇼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유교적 신분 질서와 농업 위주의 산업관을 강조함으로써 산업 철학을 1500년 전으로 돌려버렸다. 조선의 건국 세력이 기원전 196년 즉위한 한무제가 주창한 ‘농자천하지대본’을 국시로 삼은 것은 시대착오적이었다. 국가 기본 설계의 결함으로 정체된 조선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산업혁명의 흐름을 놓치고 변방으로 전락했다.
◆힘의 논리 외면하고 선악의 논리로 사실을 왜곡한 사례들 = 강약의 논리를 외면한 채 선악의 논리(도덕)를 앞세워 무거운 책임을 회피한 역사적 사실로 먼저 병자호란을 얘기해 보겠다.
‘병자호란은 미개하고 폭력적인 만주족이 선량한 문화국 조선을 유린한 것이며 만주족에 고개를 숙이지 않은 절개를 높이 기린다’는 식의 역사 서술은 국내 정치 투쟁의 명분을 지키고자 국가 안보를 포기함으로써 백성을 고난과 치욕으로 몰아넣은 집단 이기주의 정치 세력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1636년 병자호란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청나라와 명나라 간 중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광해군의 외교 노선을 버리고 명나라 편에 서서 노골적으로 청나라를 적대시함으로싸 자초한 사건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세계 최강의 기병부대와 세계 최고 수준의 포병부대를 운용하고 있었기에 조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으므로, 전쟁을 피해야 했고 청나라의 요구를 적당한 수준에서 들어줘야 했다. 피할 수 있었던 병자호란을 자초한 당시 조정에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온당한 역사 서술이다.
병자호란은 두 나라의 주력부대가 격돌한 큰 전투가 없이 종결됐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널 움직임을 보이자 도원수 김자점은 서북면의 조선군 장병에게 산성에 들어가 전투에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정예 조선군 장병을 병자호란 내내 산성 안에 묶어두는 군사 상식 밖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압록강을 넘은 지 불과 5일 만에 청나라군이 한양에 나타났다. 조선은 최대 추정치 50만명의 백성을 노예로 바치고 정권을 유지했다. 그런데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게 충절이라고 왜곡한다.
북벌 계획의 진정성도 의심스럽다. 도원수 김자점은 인조반정의 핵심 세력이었는데 이 사람이 나중에 정치적으로 몰리니까 청나라로 북벌 계획을 밀고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이를 무시했고 오히려 김자점이 제거된 걸 봐도 북벌 계획의 초라한 실체를 알 수 있다. 세계 제1의 대제국이 된 청나라 입장에서 보면 북벌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기에 김자점의 밀고는 통할 수가 없었다. 북벌 계획이 현실성이 있었다면 청나라에 밀고했을 때 청나라가 그렇게 반응했겠는가?
또 간악한 일본이 선량한 조선을 유지했다는 프레임에 갇혀서도 안된다. 조선보다 훨씬 열등했던 일본이 어떻게 조선을 넘어서 세계적인 강국이 됐는가를 열심히 탐구해야 한다.
◆일본, 조선이 버린 무기로 조선을 치다 = 일본은 조선이 버린 무기로 조선을 쳤다, 조선이 버린 무기는 △바다 △은 △도자기였다. 먼저 조선이 바다를 버린 해금정책을 펼치다 보니 동아시아 무역의 주도권이 일본에게 넘어갔다. 일본은 동남아시아, 인도까지 진출해 아시아 무역의 중심에 섰다.
두 번째는 은. 조선 연산군 때 함경도 단천 광산에서 세계적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바로 은광석을 제련하는 기술의 발명이다. 은은 납과 붙어 있어 납을 떼어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서양에서는 이 문제 해결에 수은을 썼는데 은광 노동자들이 수은 중독으로 오래 못 살았다. 그런데 조선에서 연은 분리법 또는 은연 분리법이라는 획기적인 제련 기술을 발명한 것이다. 당시 유럽, 남아메리카, 중국을 잇는 삼각 무역에서 국제 결제 통화 역할을 하는 게 은이었기 때문에 은을 효율적으로 제련해 생산량을 늘리는 건 곧 국가의 부강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은이 많이 생산되면 사치 풍조가 만연할까 두렵다며 단천 광산을 폐쇄했다. 그러자 조선이 버린 이 획기적인 기술은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 시마네현에 있는 이와미 은광을 세계적인 은광으로 올려 놓았다. 이와미 은광은 전세계 은 생산량의 1/3을 차지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컸다. 당연히 일본이 국제 무역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졌고 유럽의 열강들이 일본과의 무역권을 차지하고자 각축을 벌였다. 처음 포르투갈을 거쳐 최종적으로 낙점 받은 나라가 네덜란드였다.
세 번째 도자기. 조선백자가 뛰어난 것은 소재 혁명에 있다. 진흙이 아닌 고령토라는 하얀 흙으로 만든 게 조선백자이다. 조선백자는 어떤 금속 성분이 있느냐에 따라 파랗게 보이기도 하고 빨갛게 보이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군들은 그걸 보고 보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삼평, 심수관 등 보이는 대로 도공을 잡아갔다. 이삼평은 일본 번주로부터 엄청난 대우를 받은 인물로 일본에서 고령토 광맥을 발견해 백자를 생산했다. 그 백자에다 일본식 무늬와 채색을 해서 유럽에 팔아 엄청난 돈을 벌었다.
◆19세기 조선 조정의 삽질 = 19세기 조선 조정에서 삽질한 일이 매우 많은데 그 중 하나로 임오군란을 설명하겠다. 임오군란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임오군란은 1882년 부당한 대우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대의 장병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이 사건의 의미는 크게 두가지로 고종의 원병 요청으로 청이 군대를 파견해 대원군을 납치하고 반란을 진압했다는 것과 또 임오군란 진압 후 조선과 청나라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했다는 사실이다. 이 조약은 지극히 불평등한 내용으로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 내륙에도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치외법권을 인정받았다. 게다가 조선의 왕과 청나라의 북양대신을 동급으로 규정해 조선은 청나라의 직할 속령이 됐으며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됐다.
1885년 영국 해군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여수 앞바다의 거문고를 점령하고 해군기지를 만들었다. 조선이 세계 최강 영국과 가까워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이 거문도 사건은 1882년 임오군란 뒤에 벌어진 것으로 당시 조선은 청의 직할 속령으로 되어 있어 아무런 외교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그때 영국과 잘 했으면 영일동맹이 아니라 영조동맹이 이뤄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계사·동양사 관점에서 한국사의 재해석 = 우리 역사는 세계사, 동양사 관점에서 재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예로 아관파천을 그레이트 게임 선상에서 살펴보겠다. 여기서 말하는 그레이트 게임은 영국과 러시아 간의 투쟁을 말한다. 아관파천은 1885년 을미사변 후 친일 내각이 들어서 일본의 핍박이 거세지자 고종 황제가 1896년 12월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이다. 그러면 아관파천은 일제의 마수를 피하기 위한 용단이었는가? 아니면 조선을 국제 미아로 만든 구렁텅이였는가?
결론적으로 고종의 선택은 당시의 국제 정세를 보면 한참 잘못된 선택이었다. 러시아는 당시 대세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이 적대시하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1885년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한 적이 있는 영국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이 러시아로 접근하는 게 걱정거리였으며, 영국과 공조하는 미국의 입장에서도 우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조선 스스로 연출한 것이다.
모든 잘못은 국제 정세와 국제 역학관계,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 관계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지 못한 조선 지배층, 그중에서도 특히 고종의 무능함에 있었다. 영국의 국제적 위상, 영국과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레이트 게임에 관한 지식을 조금만 갖췄으면 러시아 공관으로 가는 길이 망국의 길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신라가 당군을 상대로 무력투쟁을 했다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당군이 철수하면서 포기하고 간 한반도의 일부(대동당-원산의 이남)를 신라가 차지했는데 간신히 한반도의 일부를 확보하는데 그친 신라로선 정통성과 지배권을 주장할 근거가 절실하게 필요했을 것이다. 당시 당군이 철수했던 것은 토번의 침략을 받아 실크로드 통제권을 상실할 위기를 맞아 동방원정군을 토번과의 전쟁에 동원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만주가 진공 상태가 되고 이곳에서 거란, 여진, 고구려 간의 세력 싸움이 벌어졌다. 거란이 한반도로 남하해 신라군과 붙은 게 매소성전투인데 이를 대당투쟁으로 미화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당나라는 고구려 지역에 안동도호부, 백제 지역에 백제도호부, 신라 영토에는 도호부보다 격이 낮은 계림 대도독부를 뒀다. 이 얘기는 신라는 독립국가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미 당의 번신이 된 신라가 진공 상태가 된 만주를 두고 새외민족끼리 겨루며 땅을 확보하는데 당나라가 왜 딴지를 걸겠는가? 번신이 땅을 넓히면 그게 당나라 영토가 되기 때문이다.
◆현대 이론으로 재해석한 신립 장군의 탄금대 전투 =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의 탄금대 전투 패배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다. 신립 장군이 비난을 받는 이유는 높고 험한 곳인 새재가 아닌 충주 벌판의 탄금대에서 왜군과 맞서는 전술을 택했다가 참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군사학의 METTE-TC 이론의 관점에서 신립의 결정을 분석해보자. METTE-TC에서 M은 주어진 입무, E는 적의 규모와 전투력, T는 아군의 규모와 전투력, T는 지형과 기후, T는 주어진 시간, C는 민간에게 미치는 피해 등을 뜻한다. 신립 장군이 조정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 적군의 상태, 아군의 전투력, 지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새재가 아닌 탄금대에서 결전을 치른 건 합당하다고 볼 수 있다. 곧 출현할 왜군과 결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신립의 입장에서는 사지라고 판단되는 새재에 진을 칠 수 없었고 주력 부대가 궁기병이기에 평야 지대면서 왜군이 지나칠 수 없는 요충지인 충주에서 결전을 치르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전투 당시 날씨가 좋지 않았고 왜군의 전술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부족해 신립의 기병대가 제힘을 쓰지 못한 게 주요한 패인이었다.
◆“‘일제 식민 통치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은 틀렸다” = ‘일제 식민 통치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은 논리적 허점이 많은 왜곡된 주장이다. 식민지 근대화 옹호론자들은 1945년 조선이 1910년보다 발전했으니 식민 통치가 긍정적인 효과를 미쳤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런데 1945년 한국과 1910년 조선을 단순 비교하는 접근법은 틀렸다. 조선 스스로 근대화에 나서 1945년까지 이룰 수 있는 상황과 해방 직후의 상황을 비교할 수 있어야 학문적인 접근이다. 수식과 도표, 여러 정황 증거는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을 밝히는데 부족함이 없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1945년 민족분단과 1950년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이다. 일제 식민 통치가 한국을 위해 의미있는 일을 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본다는 대전제 아래 일본의,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조선근대화였다.
식민지 근대화 옹호론자들이 주장하는 식민 통치의 효과를 측정하려면 조선이 식민지가 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전했을 때 1945년까지 이룰 수 있는 수준, 즉 Si(1945)와 S(1945)를 비교해야 한다. 여기서 S(1945)=S(1910)+식민통치 효과이다. 다만 Si(1945)는 측정하기가 쉽지 않기에 다음과 같은 논리가 뒷받침돼야 올바른 판단이 가능해진다.
식민 통치가 정당화 되려면 ‘S(1945) > Si(1945), S(1945) – Si(1945) >0’이 성립해야 한다. 그러나 Si(1945)가 S(1945)보다 낮다고 해도 반드시 식민 통치가 긍정적 효과를 봤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만약 Si 함수의 도함수 dSi/dT가 S 함수의 도함수 dS/dT보다 가파른 모습을 보여 1945년 이후 특정 시점에서 Si 함수 곡선이 S 함수 곡선을 뚫고 위로 올라간다면 식민 통치의 효과는 부정적으로 된다.
일본이 조선 국토 안에서 추진한 인프라 건설, 산업 기반 구축, 교육 내용을 들여다봐도 일본의 목표는 ‘최선의 조선’을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가 끝났을 때 조선의 산업구조는 경공업과 농업 그리고 광업으로 이뤄져 있어 산업 고도화와는 거리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의 산업구조는 보다 발전된 형태로 진화하지 않고 정체 상태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만일 식민 통치 옹호론자들이 옳다면 조선 땅에도 제철소가 건립돼야 했으며 대규모 조선소가 세워졌어야 했다. 일본은 조선의 산업을 일본 본토 산업 체계의 일부라고 생각했기에 일본에 존재하는 제철소와 조선소를 조선 땅에 세울 이유가 없었다. 일본이 ‘조선의 최선’을 추구했다면 당연히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을 폈어야 했다. 조선의 산업은 일본의 산업을 보완하는 수준에서 육성하면 충분했다. 그렇기에 식민지근대화론에는 논리적인 허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1960년대 KBS의 어린이 프로그램으로 ‘누가 누가 잘하나?’가 있었다. 어린이들이 서로 먼저 대답하겠다고 “저요 저요‘하던 소음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누가 누가 잘하나?’와 같은 무질서한 개인 경쟁보다 ‘우리 모두 다 같이’라는 협동을 내세우면 사회가 보다 건강해지지 않을까? 놀랍게도 식민 조선에서는 ‘누가 누가 잘하나?’ 식의 교육이 이뤄질 때 일본 본토에서는 ‘우리 모두 다 같이’ 식의 교육이 이뤄졌다. 식민지 백성을 서로 협업하지 않고 개인끼리 경쟁하며 서로 시기하며 분열하게 만든 것이다.
◆영림원CEO포럼
영림원 CEO포럼은 2005년 10월 첫 회를 시작하여 매달 개최되는 조찬 포럼으로, 중견 중소기업 CEO에게 필요한 경영, 경제, IT, 인문학 등을 주제로 해당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강연한다.
영림원 CEO포럼은 2005년 10월 첫 회를 시작하여 매달 개최되는 조찬 포럼으로, 중견 중소기업 CEO에게 필요한 경영, 경제, IT, 인문학 등을 주제로 해당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강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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